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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원이라는 시간을 이기는 방식", 고봉수: <튼튼이의 모험 (2017)> (Take 6)

문화예술

by 밍기적아이(MGI) 2019. 9. 7.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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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수록 무의미해지는 것


  ‘왜 하냐’, ‘무슨 의미가 있냐’, ‘무슨 도움이 되냐’라는 물음은 결론적으로 ‘왜 사냐’는 식의 물음으로 귀결된다.

   ‘왜 사냐’는 물음은 참으로 무익한 말이다. 아니, 유해한 말이다.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은 의미란 계속 물을수록 무의미해진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 말은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또 니체는 이런 말을 했다. ‘머리를 진흙에 처박는 사상가들이 있다. 이는 깊이나 철저함의 표시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랑스러운 지하인들이다.’ 이 말은 많은 해석을 낳았지만 나는 이런 해석을 따르겠다. 여기서 진흙이란 근거를 뜻한다. 그래서 깊이나 철저함이란 근거가 얼마나 탄탄한 것인지 혹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를 뜻한다.


   그렇기에 사랑스러운 지하인들이란 근거를 따지지 않는 사람이다.

   왜냐면 근거에는 근거가 없고 바닥에는 바닥이 없기 때문이다. 법치국가는 헌법을 근거로 돌아가지만, 헌법은 무엇을 근거로 만들었는지 물어보면 난감해진다. 일종의 도그마인 것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본질은 욕망이다’라며 사람은 욕망의 강도를 알 수 있을 뿐, 욕망의 이유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이해란 하고자 하는 사람의 몫이다.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의 영역이 아니라 몰(沒) 이해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고 있는 자신이 대답을 갖는 경우가 많다.
 

튼튼이의 모험 스틸컷

   하지만 질문은 그치지 않는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무슨 가치인지 끊임없이 생각한다. 평소에는 이런 답 없는 질문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 작가 제임스 서버는 ‘어떤 생각이든 1시간 정도만 해도 혼란과 불행으로 이어진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혼란으로 이어지는 것이 생각만 그런 것은 아니다. 엔트로피의 법칙에서 모든 물질은 무질서(혼란)로 증가한다고 한다.

   그 물질 속에 사람이 있고 그 사람 속에 마음이 있다. 그래서 의미를 구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어차피’, ‘결국엔’이라는 말로 끝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는, 가치는, 의미는 구하고자 하는 사람의 것이다. 그리고 구하고자 하는 순간의 것이다.

튼튼이의 모험 스틸컷

   영화는 끝까지 충길이 왜 레슬링을 하는지 본인 입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돈 벌려고 아버지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것은 감정의 분풀이이지 의미의 이유는 될 수 없다. 충길은 아는 것이다. 레슬링을 할 때에만 레슬링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게다가 이유를 생각하면서 레슬링을 하는 것은 걷는 것을 생각하며 걷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생각하기보다는 행동해야만 하는 것을. 말할 수는 없어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돈이 되거나 혹은 이력서에 몇 줄을 더 쓰거나 이런 종류의 일들은 이득을 염두에 두고 일해야 버틸 수 있다. 애초에 사람이 하는 행동 중 거의 대부분이 돈을 쓰는 일인 것을 알면 그 반대인 돈을 버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다. 돈을 버는 것은 돈을 쓰는 일을 전제한다. 쓰지 않는다면 벌 이유도 없다.

   충길이 레슬링을 하는 것은 의미를 버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의미를 쓰게 하는가. 그것은 일상이다. 일상은 꾸준해서 또 이길 수 없어서 무섭다. 일상은 뒤에 시간을 엎고서 매일매일은 철에 드는 녹처럼 삶을 갉아먹는다. 그렇게 일상에 먹힌 사람들은 의미를 찾지 않는다. 그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관성으로 산다. 지금까지 살아왔기에 살아가는 것이다. 발을 디딜 수 없는, 그래서 안정된 것이란 없는 무중력 상태에서 엔진이 작동하지 않아도 나아가는 우주선처럼 살아간다.
 
  다시 돌아가서 왜 하는가?

그것은 무익한 질문보다 유해한 질문이다. 그러나 모든 유익은 유해를 전제로, 과정으로 성립된다. 그리고 의미를 얻은 사람은 의미를 간직하지 않고 매일 다시 발명한다. 모든 의미는 시간과 같이 가버린다. 랭보가 사랑은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고 말했듯 삶도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

    충길은 관성으로 살지도 습관으로 살지도 않는다. 그는 그의 삶을 근거로 산다. 성공이나 돈이 근거가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 돈이나 성공은 숫자로 표시된다. 그 체감할 수 없을 정도의 숫자는 시간과 같이 순간을 망각하게 한다. 그것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내면을 바라본다. 거울을 바라본다.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튼튼이의 모험 스틸컷

   사람은 영원을 둔 시간을 이기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이는 시간이 답이라는 묘한 탄식과 함께 자신을 시간으로 던지게 한다. 엔트로피는 끊임없이 늘어나서 모든 것이 무질서로, 영원으로 흘러간다. 의미도, 삶도 시간 속에 있기에. 영원 속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어 보인다.

   죽음이라는 영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허무함을 토로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충분히 공감할 만한 발언이다. 그리고 감정은 순간적이다. 순간을 기억하는 것. 간직하는 것도. 시간과 정정당당히 싸우면 게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을 이기려면 일단 같은 링에 서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시간 앞에 패배하지 않기 위해 불로초를 구하던 진시황은 끝에 가서 묫자리를 걱정하다가 죽었다.

   삶이 영원하지 않은데 왜 영원을 구하려고 하는가. 한 개의 거울로 뒷머리를 보는 것처럼 어리석고 불가능한 것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듯 숫자 앞에 사람은 없다. 순간을 사랑해야 한다. 충길이 몇 번씩 지고, 깨질 것을 알아도 사진을 보며 ‘쎄이야’를 계속 외치는 방법론과 마음이, 사람이 시간을 이기는 유일한 방식일 것이다.

   삶이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방식이다.

 

 박한
편집 진누리, 노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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