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도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를 찾는다고 하면 다름 아닌 거울이다.
충길과 코치의 버스 안에서도. 혁준과 그의 누나의 이발소나. 대화하는 곳에서는 빠짐없이 거울이 있다. 거울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인가. 주변에 폐업한 거울 공장이라도 있단 말인가. 다만, 그런 묘사는 일절 없는 것으로 보아 그런 추측은 비약이다. 거울이 무슨 일을 하는가. 그냥 비춰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거울이 영화에 없다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거울이 없다고 해서 스토리에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만. 스토리에 큰 상관이 없는 거울이 많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거울이 중요하다는 방증이 된다.
거울은 무엇인가. 빛을 비추어준다.
다만 정확히 비추어주지는 못한다. 여기서 인물들이 대화하는 곳에는 거울이 있다. 여기서 나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대화에 능숙하지 못하다. 언성이 높아지기 일쑤고 인신공격까지 해댄다. 그들이 대화하면 곧 감정적인 분출이 될 뿐이다. 가장 대화가 빗나가는 인물은 충길과 그의 아버지이다. 충길과 아버지의 세 번째 식사 장면에는 거울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텔레비전이 있다. 블랙 미러가 있는 것이다.
이 화면은 그들을 비추지 않는다. 상관없는, 맥락 없는 영상만이 나온다. 전부 광고 영상이 나온다. 광고는 당연히 돈에 관련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케팅의 산물이다. 그래서 충길과 아버지의 대화도 계속 돈에 관한 것이다. 아버지가 말하는 돈에 충길을 반대하든 동의하든 돈을 말할 수밖에 없다. 대화의 주체가 자본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충길과 아버지의 네 번째 식사 장면에 텔레비전은 광고 같은 단발성 영상보다는 어떤 사람의 취향을 보여주는 영상이 돌아간다. 그때의 영상은 그의 취향을 인정해주고 보듬어주는 시선과 내레이션으로 화면의 남자를 지지한다. 이때, 부자의 대화는 블랙 미러의 안처럼 정적이고 평온하다. 첫 번째 식사 장면은 맥락 없는 광고 영상이, 두 번째의 식사 장면은 톤은 부드럽지만 대립하는 남녀가 나왔다. 그런 점에서 네 번째가 돼서야 아버지가 충길을 지켜보기로 한 상태가 되었다. 코치와 충길 아버지의 때의 블랙 미러는 개가 나온다.
여기서 나오는 개는 충길이다.
개를 돌보는 가족들은 개를 걱정하고 아낀다. 그런 가정적인 이미지가 나오는 영상에는 서로를 가족같이 대하는 코치와 충길이 아버지가 있다. 코치와 아버지의 대화 분위기는 무뚝뚝하고 정이 없지만, 텔레비전에는 온화하게 그려진다. 그러면 혁준과 혁재의 대화는 무엇인가. 중식집에 간 혁준의 뒤에는 거울이 있다. 거울에는 시계가 있다. 형제들은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때가 있다면서 혁재는 혁준에게 때가 있다고. 내가 너라면 뭐든지 했을 것이라고 충고한다.
이렇듯 그들의 대화가 성립되는 곳에 있는 거울에는 그들의 본심을 보여주고 있다. 신기한 것은 사람 한 명이 거울을 대할 때는 진실해지는 것이다. 미용실에 자주 오는 단골이 혁준의 누나가 사라지자 바로 혁준의 뒷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 말을 들은 혁준은 다른 사람의 진심을 듣고서 레슬링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런 혁준이 이상할 정도로 자신감이 폭발하는 순간도 있다. 시합 전날, 체육관에 있을 때 충길과 혁준하고 이야기하고 있다. 카메라는 혁준과 그의 뒤에 있는 창을 찍는다. 충길과 대화를 나누지만 실은 혁준은 상대방에게서 대답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백과 다를 바 없다. 창은 거울이 아니지만, 밤이 되면 거울이 된다. 밤이란 달이 빛나는 시간이다. 달은 혁준에게 꿈이다. 꿈이 빛나는 시간에 그는 진실하다.
코치는 시합이 끝나자 혼자가 된다.
더 이상 버스에 충길은 없다. 버스 후사경에는 충길이 보이지 않는다. 코치가 있다. 코치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토록 반복했던 책임을 지지 못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에게 진실은 묵음이다. 그러나 그 묵음은 그가 택한 것이고 다른 사람의 침묵을 대변한 것이다.
충길의 체육관에는 사진이 있다. 두 팔을 벌린 채 영광스러운 순간을 찍은 사진이. 이 사진을 보고 충길은 자신도 팔을 벌리게 된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충길이 똑같은 자세를 취한 이상 곧 충길의 거울이 된 셈이다. 그 거울 앞에서 충길은 레슬링 동작을 취하고 연습을 한다. 몸으로 말하는 것이다.
연습을 하는 것은 시합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그는 다시 시합에 나갈 것을 암시한다. 아버지에게 이번 시합만 하고 진권에게 이번만 도와달라고 한 것은 그의 연습 앞에서 거짓말이 된다. 그의 진심은 레슬링을 계속하는 것에 있다.
영화에서 거울은 대상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수치상의 시간으로 봤을 때, 거울은 너무나 비효율적인 물건이다. 사람이 하루에 거울을 몇 번이나 몇 분이나 대하겠는가. 하지만 거울을 그 몇 번과 몇 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 자신을 보기 위한 순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 순간에만 거울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거울을 몇 분밖에 보지 않는다고 거울이 쓸모없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는 순간, 마주 보는 순간에만 있는 것이 있다. 그때의 거울은 대상과 조응한다. 거울은 비춘 대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타자가 거울을 볼 때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다듬기 위함이지 거울을 다듬어 자신을 보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래서 거울은 대상을 숙주 삼아 주체의 가치를 정립한다.
글 박한
편집 진누리, 노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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