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리되 같아지지 않는다
첫 장면은 텅 빈 교실에 충길이 잠자는 장면이다.
충길이라는 캐릭터는 학교에서, 교실에서 잠을 자는 사람. 죽어있는 사람. 꿈을 꾸는 사람이다. 수업이 끝나도 끝난 줄 모른다. 이는 그의 학교생활이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비치지만 그가 끝을 모른다는 캐릭터라는 것을 동시에 보여준다. 잠의 끝은 다른 사람, 이름과 얼굴도 등장하지 않는 사람이 알려준다.
작품에서 끝은 타인이 알려준다. 본인은 알지 못한다. 여기서 잠을 깨운 행위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일을 하는 것뿐이다. 그의 일은 피해를 주기 위함도.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저 일이다.
덕분에 충길은 잠에서 깨어난다.
잠을 깨우는 행위는 사적인 감정이 섞인 것도 아니고 일부러 충길을 깨우기 위한 모략도 아니다. 그 사실을 충길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가만히 일어난다.
충길은 방학을 맞는다. 그의 방학은 학교생활과 같다. 단조롭고 규칙적이다. 식사하고 청소하고 일을 하고 편지를 쓴다. 단편적으로 나오는 장면들만 보아도 그의 생활은 일상 속의 따분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왜 따분할까.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없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일을 하기 때문이다. 기술을 알려주던 레슬링 코치는 버스 기사를 하고 같이 레슬링을 하던 진권은 막노동을 뛴다. 그들의 일은, 노동은 돈을 벌고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유용하다.
영화에서 충길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도 돈이다. 충길의 아버지를 포함하여 코치, 진권 등은 돈을 말한다. 돈 없이 살 수 없으니까. 충길, 역시 아르바이트로 돈을 버는 처지이다. 다만 돈에 신경 쓰지 않는다. 슈퍼 사장님이 풋내기라서 돈을 많이 주지 못한다는 말을 했을 때, 그는 개의치 않는다. 돈이 그를 좌지우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도 자본주의 체제에 속한 인물이다. 좋든 싫든 자본주의에서 자본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숫자라는 무식하고도 무시 못 할 압박 속에서 충길은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여기서 자본이라는 유용함에 동조하지 않는 충길의 태도는 무용함을 지지하는 것이고 순간을 잡는다는 것이다. 자본은 숫자로 경중을 매긴다는 점에서 시간과 같다.
그리고 충길은 자본과 시간의 수에 굴복하지 않는다.
글 박한
편집 진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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