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대나무숲 페이지 가봤어? 요즘 대학교 페이스북 페이지에 ‘대나무숲’ 은 다 하나씩 있잖아. 익명이 확실히 보장되는 곳에서 우리 학교 학생들끼리 떠드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긴 하지. 하지만 좋은 점이 있다면 나쁜 점도 꼭 같이 있다는 것! 대나무숲 페이지엔 늘 좋아요가 100개 이상 댓글도 100개가 넘는 ‘논란’이 되는 글도 함께 하는 것 같아.
애초에 ‘대나무숲’ 이라는 게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인걸 아는 임금님 전담 이발사가 입이 너무 간질거려서 대나무 숲에 몰래 가서 소리쳤던 것에서 유래되었잖아? 그렇게 보자면 쑥스러워서 전하지 못했던 고백이나 감사인사, 사과 같은 따뜻한 제보보단 짜증나고 섭섭하지만 티내기에는 창피했던 ‘화’가 담긴 글이 대부분인 것 같아.
우선 익명성에 대한 놀랍고 무서운 실험을 하나 살펴보자. 미국 스탠퍼드 대학 짐바르도 교수는 실험자를 2개 그룹으로 나눠 학습장면을 설정하고, 문제의 답을 틀린 학생에게 전기충격을 주도록 실험 참가자에게 지시했어. 처음에는 양 그룹이 서로 인사를 하고 이름도 알려주도록 한 실명집단의 실험이었지. 두 번째는 전기충격을 주는 사람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천으로 완전히 가려 익명성을 철저히 보장받게 했어. 실험 결과는 익명집단이 실명집단보다 상대방에게 2배 이상의 전기충격을 준 것으로 나타났어. 익명성이 보장될 때 우리가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하는지 알 수 있는 실험이었어. 비교적 유명한 실험인 밀그램 교수의 실험도 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명령을 받은 피실험자들의 65%가 450볼트의 전기충격을 주었지. 이외에도 여러 실험이 있겠지만 우리가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는 것이 인간을 과감하게 혹은 폭력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게다가 요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과 sns를 많이 활용하는 것으로 보면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 사실이기보다는 얼마나 자극적인지가 사람의 이목을 끌고, 비도덕적인 게시물이나 누군가를 저격하는 글들도 자극적이기만 하다면 사람들의 입맛에는 딱이지.
내가 요즘 즐겨보는 웹툰 중에 Daum사의 ‘점핑걸’을 보면 일명 마녀사냥이 얼마나 무서운지 유쾌하게 풀어가고 있어. 만화의 주인공은 경호원 친구의 부탁으로 톱스타 콘서트 장에서 아르바이트를 도와줘. 그 날 이벤트의 일종인 폭죽을 쏘는 총을 진짜 총으로 오인하고 가수를 구하기 위해 무대로 몸을 던지게 되는데 하필 가수 위로 떨어지고, 콘서트는 엉망이 되어버려서 팬들이 화가 많이 났지. 여자였던 주인공은 톱스타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무대로 뛰어든 것으로 기사가 나버렸어. 얼굴이며 신상까지 다 까발려진 여자주인공은 그 이후 회사에서도 잘리고 집 앞 슈퍼마켓에 갈 때도 모자며 선글라스를 써야할 만큼 많은 피해를 입게 되지. 지금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인기검색어만 봐도 잊을만하면 ‘ㅇㅇ대 ㅇㅇ녀’ 라는 식으로 해당 사건과 관련지은 조롱식의 별명들이 붙여진 순간, 옹호하기보다는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이 사람들은 더 재밌으니까. 게다가 나인 줄도 모른다면 더욱 신나게 깎아 내리는 거지. 익명성이 허용된다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감이 사라지니까 문제가 생기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도피할 수 있어.
우리가 익명을 버린다면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것이 조금 순화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나만 하더라도 내 이름을 걸고서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댓글을 다는 것이 쉽지 않을 거 같거든. 내 이름을 건다면 나중에 ‘사실’이 밝혀졌을 때 알려져 있던 것과 다를 것을 대비해서 비난하더라도 내가 모르는 부분까지 건드리진 않겠지. 익명이 보장되지 않음은 내 친구들도 내 댓글을 볼 수 있음을 뜻하니까 험악하게 말하지도 않을 거야.
이제 ‘키보드 워리어’에 집중해보자. 많이 들어봤지? 속히 말하는 인터넷 일진이나 sns 일진 있잖아. 내 이름과 얼굴을 버린다면 세상에 못할 욕이 없겠지. 의외의 사실! 대부분의 키보드 워리어들은 현실에서는 자존감이 낮고,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것. 상황이나 장면에 흔들리기 쉬운 사람일수록, 익명 상태에서 일탈하기 쉬운 경향이 있다고 해.
이런 사람들에게 악플이란, 현실에서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한 욕구불만의 상태로 인터넷에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행위겠지. 하지만 근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상태니, 정상적인 스트레스 해소가 되지 않을 테고 그런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같아.
하지만 SNS는 그 성격이 다르지. 앞서 이야기했던 페이스북을 예로 들어볼까? 일단 내 이름과 출신학교, 때로는 전화번호와 이메일도 공개되는데다가 아는 사람들과 묶여있는 소통공간에서는 마음껏 이야기 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 이름이나 나이를 속이고 가입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친구신청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을 테니 SNS를 하는 의미도 없어질 거야. 그래서 ‘대나무숲’ 이나 ‘대신 전해드립니다’ 같은 익명을 강조한 페이지들이 인기 있고, 그만큼 매일같이 뜨거운 감자이지 않을까 싶어. 익명의 제보들은 가끔 우리를 울리기도, 화나게 하기도, 열정적이게 만들어주거나 설레게 하지. 하지만 목적 없이 하는 욕은 폭력과도 같아. 그 폭력의 피해자는 가까운 사람이거나 나일 수 있고 모두가 조금씩은 상처받았던 경험이 다 있을 거야. 나는 이런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제한적인 인터넷 실명확인제도가 아닌 보다 확실한 포털사이트의 제제와 자율적인 댓글정화가 필요할 것 같아. 그러기 위해선 사회적으로 포털사이트 중심이 아닌 언론사 중심의 보도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네티즌들의 자성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야.
말의 폭력은 물리적인 폭력보다 상처가 깊게 남을 수 있다는 말,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고 진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진 않아. 더불어 자신의 잘못이 부풀려져 상처받은 사람이나 비난조의 댓글로 상처받았던 친구들에게 위로도 전하고 싶어. 전부 너의 잘못은 아니라고,
우리 모두가 생각 없이 비난과 같이 욕을 해본 적도 있을 거고, 욕이 아닌 말에도 상처 받아본 적 있을 거야. 많이 아팠던 사람은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은데, 왜 익명의 가면만 쓰면 우리는 늘 잊어버리고 마는지, 오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익명의 그늘에 서서 상처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는지, 있었다면 과연 그것이 정당한 방법의 떳떳한 공격이었을지 생각해보면 좋겠어. 우리도 누군가에게는 가면 쓴 사람은 아니었는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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