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는 ‘가해자’가 저지른다. 본 기사는 지난 10월에 작성된 기사임을 미리 밝힙니다. 시의성 있는 글이지만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사건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이기에 이번 호에 함께 싣게 되었습니다. 기사 작성 이후 계속해서 다른 내용의 언론 보도가 있었으므로 일부 내용이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편집자 드림.
어느 때와 같이 길고 지루한 등굣길, 달리는 버스 안에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인터넷에 접속해 최신 기사를 찾아보는데, 한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띈다. ‘캣맘 살인 사건’. ‘캣맘 살인 사건? 고양이를 돌보는 캣맘이 누굴 살해했나?’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기사를 자세히 살펴보자, 용인의 한 아파트에서 길 고양이 집을 만들고 있었던 캣맘이 어디선가 날아온 벽돌에 맞아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선 ‘가해자’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하지 않은 채, 그저 ‘피해자’가 ‘고양이 집을 만들고 있었다.’는 행동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었다. 마치 그러한 피해자의 행동이 가해자에게 살해 동기를 주었다는 식으로 보도한 것이다. 그 기사를 시작으로 ‘캣맘’이라는 제목을 단 추측성 기사들이 쏟아졌다. 이처럼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사건의 초점을 맞추는 현상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일이고, ‘피해자’에게 화살을 돌리는 일이 될 수 있다.
‘캣맘 살인 사건’이라고 명명한 ‘용인 벽돌 살인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자. 지난 10월 8일 오후 4시 35분경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의 아파트에서 어디선가 날아온 벽돌에 맞아 55세 여성이 사망하고, 29세 여성은 두개함몰 및 골절의 중상을 입은 사건이 벌어졌다. 언론은 대낮에 벽돌을 맞아 사망한 여성이 길 고양이를 돌보던 자원봉사자라는 점에 집중했고, ‘주인 없는 길 고양이에게 사료를 먹이거나 자발적으로 보호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신조어인 ‘캣맘’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이 사건을 ‘캣맘 살인 사건’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캣맘’을 혐오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추측성 보도를 쏟아냈는데, 기사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가해자는 캣맘 혐오와는 ‘상관없는’ 초등학생이었다. 하지만 초등학생 가해자가 잡히기 전까지 8일 동안 한국사회는 ‘누가 그 여성을 죽였나’하고 가해자에게 초점을 두기보단 언론이 피해자에게 이름 붙인 ‘캣맘’에 집중하여 캣맘 혐오에 반응했다. 즉, ‘피해자’에게 초점을 맞춰 집중했다.
애초에 그 사건을 ‘캣맘’이라는 단어로 명명한 것 자체가 본질을 벗어났다. 대낮에 여성 두 명이 벽돌을 맞았다. 한 명은 사망하고 한 명은 중상을 입었다. 그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이고, 진실이다. ‘캣맘’을 혐오한 범인이 벽돌을 던졌다는 내용은 추측일 뿐이었지만, 그것은 가해자가 잡히기 전까지 진실처럼 받아들여졌다.
사건을 정확한 시선으로 보기 위해선 , ‘범인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나?’도 중요하겠지만 ‘범인이 누구인가?’, 즉 ‘가해자’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 ‘범인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나?’가 우선이 되면 범인에 대한 감정이입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범죄의 옹호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려, 사건의 본질을 흐려버린다. 곧, 사건을 정확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힘들게 된다.
‘벽돌 살인 사건’에선 ‘피해자’를 ‘캣맘’이라고 지칭했다. 사건의 이름도 처음부터 ‘캣맘 살인 사건’이라고 붙였다. 그 결과, 평소 길고양이에 대해 안 좋은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감정적으로 반응했고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사실에 따른 추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따른 이유로 사건을 판단하게 된 것이다. 우린 범인이 밝혀지기 전까지 피해자가 ‘캣맘’이라는 것에 집중한 사람들의 길 고양이들을 보살피는 사람들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상처주기를 바라봐야 했다. 그 분위기에 맞춰 언론에서는 자극적인 ‘캣맘 지지자VS캣맘 혐오자’의 대립 구조를 부추기는 기사를 써내려갔다. 또, 일부 캣맘들에겐 그 사건을 운운하며 협박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초점을 맞춘 ‘캣맘’이란 단어 때문에 마치 벽돌 사망 사건이 피해자의 잘못이며, 살해 동기를 제공했다는 식의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심지어 ‘캣맘’은 그저 살해 동기의 ‘추정 중 하나’일 뿐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그 ‘캣맘’이라는 단어 하나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화살을 돌리게 된 것이다.
이번 사건뿐만이 아니다. 범죄가 일어났을 때, 언론과 대중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본질은 흐려지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몇 년 전 일어난 ‘조두순’이 저지른 끔찍한 성폭행 사건 또한 처음에는 피해자의 이름이 붙었다. 그 것은 사건이 언급될 때 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계속 상기하게 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끔찍한 고통을 받은 피해자를 두 번 죽이게 되는 일이었다. 얼마 전 30대 여성을 살해하고 트렁크에 가둔 ‘김일곤 사건’도 어떤 기사에서 ‘트렁크녀’라고 다룸으로써 논란이 되었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용인 벽돌 살인 사건’도 한 초등학생이 장난으로 던진 벽돌에 한 여성이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고 이 사건이 초등학생인 가해자에게만 잘못이 있을까? 피해자에게 집중한 추측성 보도로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려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한 언론 또한 잘못이 있다. 그리고 언론의 보도만 보고 섣불리 판단한 우리들에게도 잘못이 있다. 결국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상황이 생겼다. 이러한 현상은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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