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사설] 기생보단 자생하는 비평가가 되라

오피니언

by HASHU 편집부 2019. 10. 13. 17:43

본문

나는 별점을 싫어한다. 사이트 정책상 어쩔 수 없이 부여하는 것을 빼면 내 글에서는 별점을 매기지 않는다.


지식이 특정 부류에게 한정되었던 중세나 근대. 비평가(구분이 애매해서 철학자, 사상가로도 불렸다)들은 그들만의 세력을 갖을 수 있었다. 당시 민중들은 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공부할 여유는커녕 쉬는 시간도 부족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책값은 어마 무시했다. 아무리 구텐베르크가 활자 기술을 발전시켰어도, 민중과 이후 대중들에게 널리 퍼지게 되는 것은 먼 훗날 이야기이다. 

미학자 바움가르텐


비평가들의 시대는 산업 혁명을 거쳐, 책은 물론이고 각종 매체들이 사람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비평은 이러한 흐름에 여전히 목을 뻣뻣이 세웠다. 아도르노는 대중의 우매함을 지적하면서 비난하기도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은 힘이 쌨다. 대중OO이라는 장르가 생기면서 비평의 힘은 급속도로 퇴보하기 시작했다. 아직 대중OO이 붙지 않은 장르(가령 클래식으로 통칭되는 고전음악, 순수문학으로 이야기되는 현대문학, 예술영화, 미술 대부분)에서는 이런 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붙은 장르에서 비평의 힘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생산의 증가도 한몫했다. 과거에는 작품이 몇 개 안나왔고,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문학과 음악, 영화를 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살면서 1,000권, 1,000장, 1,000편의 영화만 보아도 많이 보고 들은 것이다. 이는 비평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모든 작품을 다 볼 수 없다. 그러다보니 비평에는 공백이 생긴다. 거대한 흐름만 줄줄 외우는 비평가들은 당연히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도 알고 있는데 비평가면서 이것도 모르네' 이런 식의 불만이 생긴 것이다.

자연스럽게 비평가는 돈과 멀어지게 된다. 대중음악이 모든 예술음악까지 집어삼킨 시장에서 비평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건 이런 장르라고 선택해주고 껌이나 씹는 일이다. 드라마나 예능은 비평이 접근조차 못하고 있다. 영화나 게임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 영화는 굵직한 영화평론가(이동진, 박평식 등)들이 뉴미디어에 적응하면서 소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은 직접 플레이&리뷰를 통한 방식도 호응을 얻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흐름은 일부의 이야기이다. 신인 평론가가 비평을 하겠다고 나서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왜? 딱봐도 자기보다 아는 게 없어 보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불평을 갖고 그들을 비난하면 안 된다. 이젠 대중을 무시해서는 엄청난 역풍을 맞는다. 실제로 자기보다 아는 게 많을 수도 있고.

10월이 절반이 지나가지만 1,000을 넘은 것은 볼빨간사춘기 뿐, 당연히 비평이라는 것보다는 '볼빨간 사춘기'라는 인지도의 비중이 크다.


비평은 더 이상 비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자기가 이동진처럼 되고 싶다면 바로 포기하면 된다. 김영하가 작가 지망생들에게 했던 그 말과 비슷하다. 아니 그것보다 더 심한 말이 '비평으로 돈 벌겠다는 것'이다. 비평가가 1만 장의 앨범을 들었든 말았든 확실한 건 돈 못 번다. 글은 하루에 100명이 읽으면 많이 읽은 것이다. 그거라도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임진모가 이끌고 음악 비평의 최후의 보루 이즘(IZM)도 하나의 글의 조회수가 1,000(한 달 누적) 넘기기가 힘들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비평가들이 한 가수의 팬보다 많은 정보를 알지 못하는 점도 있다. 따라서 양적 승부를 해야하는 비평가와 질적 승부를 하는 대중들과의 괴리감은 크다. 왜냐 비평을 보는 사람들은 그 가수의 팬이 80%이다. 나머지 20%은 음악 애호가이다. 특히 K-POP 관련 음악은 이 비중이 9:1로 바뀐다. 컨셉, 멤버, 가사, 안무 등의 보이는 장치에 대해 논하려면 팬과 같은 마음으로 공부가 필요하다. 그래도 지엽적인 것을 써야겠다하면 비평은 취미로 쓰고 음악 관련 석·박사 따면 된다. 교수가 되고 나면 학생들이 글은 봐줄 테니.

그래서 비평은 지하로 숨는다.

전면에 나오지 않는다. 가끔 신문에 한 줄 '비평가의 말이다'하고 나오지만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비평의 폐쇄성은 이미 문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음악, 영화비평은 그대로 보는 사람이라도 있는데 문학 비평은 찾지 않는다. 소설집, 시집 뒤에 붙여 나오는 그런 글귀가 비평이다라고 알고 있을 뿐이다. 거기까지 읽는 사람은 정말로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작품이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일 것이다. 

읽지 않는다면 변해야 한다

문보영 시인의 <어느 시인의 Vlog>


그런 면에서 문보영 시인은 칭찬할만하다. 읽지 않는 시집을 자신의 브이로그(Vlog)를 통해 읽게 만들기 때문이다. 비평도 창작이라면 콘텐츠를 창작하면 된다. 그런데 비평은 아직도 구시대적으로 수도권 중심이다. 외국의 아티스트는 줄줄 외우면서 우리나라 지방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들을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

시인들도 지방에서 투고하는 세상에서 비평은 메인스트림 위주로 이야기되고 있다. 기생하는 장르라고 놀림받았는데 이제 정말 기생 없이 살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자칭 어른들이라는 선배 비평가들이 꼬아 올린 실타래이다. 해결하는 방법은 꼬인 실을 풀면 안 된다. 그것은 답습일 뿐이고 나중에 다시 꼬인다. 그냥 새 실타래를 사는 게 최고의 방법이다.

이제 자생해야 한다. 동영상도 만들고, 새로운 가수를 알려야한다. 성공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큐레이팅 해야한다. 소개를 하는데 전문적으로 소개를 하는 것이다. 이때 그동안 배운 음악적 시작을 뽐내는 것이다. 서울에만 숨어 살지 말고 지방으로 퍼져야 한다. 그리고 지방의 축제나 가수들을 인터뷰하고 소개해야 한다. 그리고 병행하여 메인스트림을 이야기하면 된다. 기반이 없다고? 왜 나라 탓만 할까? 탓할 생각에 스스로 행동하면 된다.

그게 싫다? 힘들다? 그러면 다시 지하에서 투잡 뛰면서 하던 거 하면 된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누가 뭐라고 할까.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