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잠을 자고 있던 그레고르는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카프카 「변신」中
위와 같이 시작되는 소설에서는 왜 그레고르가 흉측한 갑충(甲蟲)이 되어 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직물회사의 성실한 외판원이었던 그는, 자신의 직업이 너무 힘들다고 불평하면서도 가족들을 부양한다는 즐거움으로 견디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레고르가 하루아침에 벌레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기본적 불안’을 갖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문득 측면으로 파고드는 고독과 무력감을 느껴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것은 복합적인 감정인 동시에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성질이다. 그렇기에, 그레고르가 변신한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불안’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레고르는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벌레가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불안감이나 정신적 스트레스, 압박감, 부담감 등이 그가 변신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라고 해석할 수 있다. 가족 부양에 대한 부담감, 항상 여행을 다녀야하는 고단한 직업, 그런 직장을 박차고 나갈 수 없게 하는 부모와 사장과의 채무관계 등의 사회적인 힘에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적대적인 세계관이 형성된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의 변신은 그러한 사회적 중압감을 못 이겨 좌절한 모습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겠다.
그는 턱의 힘으로 열쇠를 돌렸다. 그 때 분명히 어딘가 상처를 입었지만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누르스름한 액체가 입에서 나와 열쇠 위를 따라 방바닥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저 소리 좀 들어 봐요. 그가 열쇠를 돌리고 있어요." 하고 옆방에 있는 지배인이 말했다.
이 말은 그레고르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미니도 함께 힘을 내라고 소리쳐 주었으면 싶었다. 그레고르, 힘을 내라. 힘을 내라. 자물쇠를 꼭 잡아라. 이 정도의 말은 해 줄 법도 한데 말이다.
-카프카 「변신」中
가족들은 그가 돈을 벌었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았고,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는 일을 하러 가지 않느냐는 말만 할 뿐, 그가 원하는 다른 말들을 해주지 않는다. 격려와 애정이 결여된 그런 상황들 역시, 그레고르가 변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그레고르가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던 점은 바로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족에게 돈을 벌어다줌으로써, 행복과 자부심을 느끼고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레고르가 흉측한 벌레로 변한 뒤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가족들은 하나 둘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레고르가 ‘희생’으로써 유지할 수 있던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더 이상 가족들은 그레고르를 필요로 하지 않고, 오히려 “저것을 없애버려야 해요!”라며 그를 내쫒을 궁리까지 한다.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와 인간의 언어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레고르만이 가족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그것은 가족과의 단절, 그리고 더 나아가 그가 고립되는 과정을 암시한다. 그레고르는 가족들을 사랑하며, 자신이 흉측한 모습이 되었기에 그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지만, 애석하게도 가족들은 그를 멀리 하기에 급급하며, 그레고르가 작은 움직임을 보여도 “또 무슨 짓을 하는군.”하며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만 한다. 그리하여 그는 서서히 가족과의 관계를 끊으며, 결국 좌절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가 고립되는 과정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삶과 많이 닮아있다. 매일 같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불안을 느끼지만,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보려 하는 모습. 그러나 결국 바닥까지 닿게 되는 현실에서 마주하는 좌절감. 그레고르가 흉측하기 짝이 없는‘벌레’의 모습이 된 것만으로, ‘사회’라는 거울에 비춰진 우리의 모습을 충분히 볼 수 있지 않을까.
밤새도록 소파 밑에 엎드린 채로 가끔은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이따금 배가 고파서 잠에서 깨어나기도 하고, 또 걱정과 막연한 희망에 사로잡히기도 하면서 하룻밤을 새웠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결론은 한 가지였다. 즉, 당장은 침착하게 가족들로 하여금 인내와 최대의 조심성으로써, 그로 인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불쾌감을 견딜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런 모습은 아무래도 집안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카프카 「변신」中
그레고르의 욕구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애정과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며, 자신의 그런 노력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나 원하는 것이 있어도 가족들에게 재촉하지 않으며, 오히려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인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노력 하고 있다는 것을 적어도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안쓰러운 그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간절함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간절함은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서서히 줄기를 타고 퍼져나가, 결국 하나의 ‘욕구’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의 공통된 욕구는 가족들로부터,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나’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 아닐까. 때문에 우리는 모두 그레고르와 같은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언제든 외면 받을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방문 앞으로 달려가 몸을 문에 바짝 붙였다. 그렇게 하면 현관에서 들어오시는 아버지께서 문만 열어 주시면 곧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자신의 뜻을 알아주시리라 생각했다.
-카프카 「변신」中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뒤부터, 그는 자신의 방 안에서만 살아간다.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기도 하고, 누이동생이 건네준 음식들을 맛보기도 하고, 창밖을 한참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가 이런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도 볼 수 있다.
처음 벌레가 된 그레고르의 모습을 보고 난 후, 그의 아버지는 그레고르를 방 안으로 보내려고 애쓴다. 손에는 단장과 신문지를 들고 그에게 휘두르며, 위협적인 모습까지 보인다. 결국 그레고르는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방 안에 갇히게 되고, 순순히 밖에 나가지 않고 아버지의 의도에 따라 말을 듣는 순응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레고르에게 사과를 던져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아버지가, 그래서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장본인임을 알면서도, 그레고르는 자신을 타이르고 아버지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걸까. 아니면, 무엇이 그토록 절대적인 고독으로써 그에게 작용했던 걸까.
자신이 처한 현실을 말없이 받아들이는, 다시 말해 그가 체념으로써 모든 것을 수용했다는 사실이 매우 씁쓸했다. 차라리 가족을 버리고 밖으로 나갔더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착한 마음을 가진 그가 답답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희생까지 무릅쓴 결과가 결국 쓸쓸한 죽음이었다는 게, 너무 아팠다.
생각해보면, ‘변신’이라는 소재가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이솝우화나 전래동화에서도 흔히 봤을 법하지 않은가? 여우가 사람으로 변하기도 하고, 사람이 털이 돋아 동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이렇듯 흉측하고 그로테스크한 묘사로써, 그것도 주인공이 거대한 벌레가 되었다는 것은 조금 거북한 일이다.
그레고르의 알 수 없는 변신은, 결국 자신의 자아와 연결돼 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을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벌레가 된 이후에도 겉모습은 개의치 않으며, 빨리 일어나 8시 기차를 타고 일을 하러 가야한다는 생각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서서히 자신의 방에서 단조롭고 무료하게 지내는 날이 많아질수록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것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과 가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며, 가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깨닫게 되고 무기력해진다.
그레고르의 현실 자아는 ‘벌레’이다. 가족들은 그가 벌레로 변한 이후부터 그를 ‘그레고르’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한 마리의 벌레로 여길 뿐이다. 누이동생은 그에게 썩은 야채와 고기 등을 가져다주며, 심지어 그가 다니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방 안의 가구들을 모두 빼 버린다. 그 행위는 그를 완전히 벌레로 보고 있다는 것이며, 인간으로 취급할 마음이 없다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그러나 정작 그레고르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그의 실제 자아는 벌레가 아닌 ‘인간’이었으니까. 그렇게 되면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으며, 다시 가족들과 얼굴을 마주볼 수 있고, 함께 대화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미 그레고르의 현실 자아와 실제 자아는 너무 거리가 멀어져 버린 이후다.
벌레는 적나라하고 순수한 자아의 상징이다. 자신의 모든 껍데기를 걷어낸 알맹이인 것이다. 그레고르의 자아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흉측한 벌레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자아를 직면했을 때, 외면해버리고 만다. 그레고르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던 유일한 길이 가족들의 따뜻한 보살핌과 관심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주변 환경 속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자신의 존재가 소외되고 고립되면서, 마침내 자기파괴에까지 이르게 되는 한 사람의 과정이 너무 아프다. 그의 죽음이 가족들에게는 행복이라는 점 또한 안타깝다. 현대인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아픔과 좌절들이, 그레고르의 상처만큼 깊을 것만 같은 생각도 든다.
우리는 과연 흉측한 벌레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글 정다슬
편집 영글, 하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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