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는 편지를 부친다.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행위에 가깝다. 어느덧 익숙해진 갱지 봉투에 그간의 노고의 결과물들을 집어넣고 풀칠을 한다. 나는 벌써 사 년째 답장 없는 곳에 편지를 써서 보낸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소식이 없다.
신춘문예 등단이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다. 나는 내년에도 새로운 봄이 아닌, 여전히 결실 없는 헌 봄을 맞을까.
대다수의 문예창작학과 졸업생들의 목표는 메이저 대회를 통한 등단이다. 일반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등단 루트는 신춘문예 외에도 출판사 공모전 등이 있는데 대다수가 우편으로 작품을 접수받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창과 졸업생들 외에도 작가를 꿈꾸는 많은 이들이 열심히 시로 소설로 동화로 각각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 나처럼 편지를 부친다.
편지를 보내며 나는 생각한다. 도전은 답장 없는 곳에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는 것과 같다고. 우리는 살면서 이를테면 이력서와 같은 무언가를 계속해 보내지만 답장받는 일은 드물다. 분명 누군가는 합격이라는 답신을 받았다고들 하는데 나의 우체통은 몇몇 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어있다.
우스갯소리로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책을 천 권정도 읽어야 한다고들 한다. 책이 표방하는 이미지가 지적이고 분위기 있을지라도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피를 토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그 정도의 노력이 있어야만 등단이 된다는 것이다.
등단이 아니더라도 도전이란 늘상 힘든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면면에서 이렇게 어려운 도전을 하는 이들은 흔히들 본인을 다독이기 위해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도전해본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다. 노력은 우리를 너무나도 잘 배신한다는 것을.
알다시피 소수의 승자를 제외하고는 노력은 성과를 내지 못한, 선택되지 못한 다수에게는 절망을 준다. 그럴 때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가시로 돌아온다. 간절할수록 더욱 예리한 비수가 된다. 등대가 되어 주었던 그 말이 사실은 고장 난 등대였고, 고로 나를 더욱 큰 암흑으로 인도했다는 결론뿐이다. 열심히 산 대가로 인생이 건네는 이 결과는 그리 달갑지 못하다.
그렇다면 정말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틀린 말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노력과 배신 사이에 숨어 있는 빈칸에 주목해야 한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노력은 대체 무엇을 배신하지 않는 걸까?
일반적으로 사회는 은연중에 그 빈칸을 ‘결과’ 또는 ‘성과’로 정의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왔다. 즉, ‘노력은 결과를 배신하지 않는다.’가 우리가 알고 있는 문장의 완성형이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틀린 말이다. 성과주의의 환영이요, 환각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 합격 인원은 제한되어 있고 자리를 얻는 이들은 언제나 소수이며 값진 재화의 공급은 늘 수요보다 적은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공모전에서 떨어진 것만 해서 족히 스무 번은 될 법하다. 이력서 제출, 면접까지 세어본다면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나리라. 나 역시 노력에 대해 거의 집착수준으로 강조하는 한국사회에서 자라난 한 명의 국민으로서 저 말을 가감 없이 신봉했고 그에 따라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성과를 내지 못한 원인은 단 한 가지였다. 노력하지 않는 데에 있었다. 그렇게 피를 토할 만큼 열심히 했었어도 답은 한 가지로만 귀결됐다. 대체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살아 있었기에 계속해서 도전해야 했다. 빌어먹을 짓이었다.
그러나 그 빌어먹을 도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음으로 인해 나는 깨달았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몇 번의 좌절 끝에 결국 오늘날 성공한 사회인이 되었어요.’ 하는 합격수기의 흔하디흔한 클리셰가 아니다.
잠시 시계를 돌려 어린 시절 글을 배울 때로 돌아가 보자. 어느 정도 단어를 배우고 나면 으레 하는 것이 있다. 빈 칸 채우기다. 미완성의 문장에 알맞은 단어를 넣으면 되는 일이다. 인생도 이와 같다. 우리는 미완성의 인생 속에서 계속해서 빈칸 채우기를 해야 한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사이에 있는 빈칸을 ‘성과’로 채운다면 그 말은 앞서 말했듯 틀렸다. 또한 우리의 노력은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절망만이 가득한 무의미다. 그러나 그 빈칸을 ‘성과’나 ‘결과’가 아닌 ‘변화’로 채운다면 어떨까.
생각해보자. 내가 신춘문예를 위해 펜을 잡은 것, 문장을 써내려가는 것, 글을 완성한 것 모두 노력이다.
동시에 과거의 나에서 달라진 행동, 즉 노력이 일으킨 변화가 된다. 이 때문에 노력은 변화를 이끌어 내는 행동으로 매 순간 유의미하며 실패조차도 유의미하게 된다. 이로써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맞는 문장이 될 뿐더러 긍정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빈칸의 함정이다.
내가 글 사이사이의 빈칸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일은 무의미와 유의미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언제나 인간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하게 하고 그것에 대한 해석은 오롯이 개인에게 맡긴다. 그것이 인생의 잔인함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크게 바뀐다. 그렇다면 무의미와 유의미 사이 우리는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빈칸을 어떻게 완성시킬 것인가.
인생은 실패의 연속으로 만드는 견고한 성공에 가깝다.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나를 힘내게 하는 말로 빈칸을 채우리라. 설령 대회에 당선되지 않더라도 도전으로 변화하는 나로서 맞는 봄에 쓰는 글이라면 그것이 새봄의 글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것 역시 신춘의 글이리라.
나는 적어도 당신이 완성한 문장이 당신의 심신을 달래주었으면, 그래서 매 순간이 유의미했으면 한다. 세상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얼마나 잘 달래느냐에 따라 달려 있는가 싶다.
마지막으로 인생의 면면에서 치열하게 도전하며 상처 받고 있는 당신에게 나태주 시인의 ‘멀리서 빈다’의 한 구절로 이 글의 작별 인사를 고한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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