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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죽음을 바라보는 나, 겪어야하는 나

오피니언

by 대학매거진 영글 2019. 9. 19.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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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오늘은 조금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주제부터가 많이 무겁네요. 장례식장은 방문해 보신 적 있나요? 사실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죽음은 슬픈 게 맞지만 장례식장에 왜 저렇게 사람이 많이 갈까, 슬퍼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먹고 마시고 종종 웃고 떠들고...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장례를 겪어보니 그 이후부터는 장례식장을 찾을 때 그 느낌이 많이 다르더군요. 아마 겪어보신 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장례라는 것은, 글쎄요, 슬픔이 지배하는 곳이지만 막상 닥친다면 여느 막장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곡이 끊이지 않는 것도 아니고, 마치 영화써니의 한 장면처럼 유쾌하지도 않지만, 분명 검은색만은 아니라는 거예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단편적으로 보면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이고, 깊게 본다면 한 사람이 사라지고 잊히기 시작한다는 뜻이겠죠. 죽음이라는 것은 어떤 한 감정만 가져오지 않습니다. 나는 분명 슬픈 것 같은데 눈물이 나지 않을 때도 있고,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사람의 부재(不在)가 어떤 면에서는 반갑기도 해요. 참으로 무섭고 이기적이고,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는 생각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람들은, 많이 재고 있다는 거겠죠. ‘존재(存在)’에 대해서요. 누군가의 존재에 대해서 내가 재고 그로 인해 그 사람의 죽음과 부재가 주는 의미가 다르고, 슬프지만 슬프지 않고... 죽음이라는 무겁고 또 무서운 것을 받아들이는 감정의 차이를 만듭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죽음을 맞이하나요?


감히 단정하건대 대부분 병원에서일 겁니다.

어떤가요? 맞나요? 하지만 여러분 어떤가요,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은 말이에요. 죽음이 너무 빈번한 그곳에서 맞는 죽음은, 어쩌면 나의 죽음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가족들이 모이고 꺼져가는 나의 손을 잡아주고 하겠지만 일 뿐인 간호사들과 의사들, 그 무수한 생명을 살리기 위한 집기 속에서 맞는 죽음이니까요. 살리는 곳에서 꺼져가는 생명은 얼마나 안타깝고 그 의미가 무색한가요.

아직 감을 잡긴 힘들 거예요. 물론 생각은 많이 했겠지만 말이에요. 그럼 한번 죽음이라는 것을 체험해 볼까요? , 당신은 죽습니다. 어떻게 죽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병원에서 죽음을 맞지 않을까요? 나의 가족들이 손을 잡아주고 귀에 사랑한다 고맙다 이런 말을 마지막 말로 들려줄 거예요.

그리고 나의 빛은 꺼져갑니다. 하얀 천에 덥혀 장례식장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많은, 어쩌면 그 자리에 있던 소수가 나를 위해 울어줄 겁니다. 입관 전, 나는 어딘가에 보관됩니다. 이제 생기가 없는 육체가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지요. 가족들은 무얼 할까요. , 나의 사진을 걸고 연락하고 준비하고... 이제 조문객이 올 거예요. 많이, 어쩌면 조금. 가족들은 종종 나를 위해 슬퍼하고 울지만 조문객을 맞느라 정신이 없어요. 내 마지막 성의라며 그들을 대접합니다.
하루가 지나고, 내 몸은 깨끗하게 씻어집니다. 이젠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이 장의사들의 손에 들리고, 접히고, 어느덧 내 몸은 한지 혹은 천으로 뒤덮이죠.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이 우네요. 그들은 이제 정말 내 곁으로 다가와 마지막 말을 해 줍니다. 나는 관에 들어가죠. 이제 정말 캄캄하네요. 나는 죽었습니다. 가족들은 다시 정신없이 손님을 맞아요. 어쩌면 이것은, 나 혹은 당신의 부재를 잊기 위한 스스로의 방어일지 모릅니다.
장례 마지막 날, 이제 드디어 장례식장을 나옵니다. 나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 가족들과 함께 차에 탈수도 없고, 집 문을 열거나 불을 켜거나, 침대에 누워 쉴 수가 없어요. 이제 떠납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날 자주 찾아주길 바랄 뿐이죠. 하관하고, 나를 위해 초우제든 기도든 그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걸 성심껏 해줄 거예요. 굳어져 온 절차가 끝나고 탈상이란 걸 하게 되면, 이젠 비단 몸만 죽는 것이 아니라 라는 존재가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죽음이란 건, 아직 경험해 보지 않아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남는 사람만큼 떠나는 사람도 비참한 그런 것일 거예요. 죽음을 맛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글쎄, 오늘날 과학이란 것이 너무 많은 발전을 해서 언젠간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직 사람은 죽는다라는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우릴 지배하는 것 같군요.

그 제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열심히 살고, 항상 시간의 촉박함을 느끼며, 이것저것 시도하는데 많은 고민을 하고, 고민하는 데 쓴 시간에 대해 또 고민합니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덜 열심히 살고, 너무 느긋하게 살고,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기도 하죠. ()이 있다면, 우리에게 왜 죽음을 부여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우리는 영원을 아는 영원하지 않은존재가 되었을까요.

물론 답은 없습니다.

더 무거운 질문을 던지겠노라 선전포고를 하고 글 문을 열었지만, 사실 제 생각을 한번쯤 정리해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죽음에 대한 생각은, 마치 여러 개의 풍선 다발처럼 내가 잡고 있긴 하지만 제각각 다른 양상에,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디 날아가지는 않아요. 나를 비상하게 하지만 나의 짐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장황하고도 추상적인 글을 쓴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한 번쯤은 생각해볼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말이에요. 굳이 어디에서 죽나, 내가 죽으면 어떨까 이런 것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한번은 꼭 경험하게 된 이 죽음이라는 것은 구체적이지도 않고, 어느 한 곳에 정착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죠.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죽음을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적 측면의 죽음을, 어떤 사람은 생물학적 측면에서 죽음을, 또 어떤 사람은 철학적 측면의 죽음을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래요,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어떤 모습으로든 있는 것이 죽음이니까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근본적인 질문이 나올 거예요.

왜 죽게 되었을까.’ 그 이유가, 어쩌면 우리 인간은 알 수 없지만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실소가 나올 수도 있겠죠. 그만큼 죽음은 우리를 오래도록, 아주 강하게 붙잡고 있다는 반증이 될 거예요.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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