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무렵 러시아 소설가이자 사상가의 거장 톨스토이는 그의 작품 단편선을 통해서 말한다.
“사람은 걱정을 하면서 살아가는 듯 하지만 사랑을 하면서 살아간다.”
또한 몇 세기가 지난 현재에도 적용되는 패러다임과 메세지를 담은 빅토르위고의 레미제라블은 그 모태를 ‘사랑’에 기초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뭐라고 정의해야할까? 아니, 사랑을 정의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세상만큼이나 많은 단어들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속에 담겨진 의미 또한 제각각 다르다.
누군가는 이성을 사로잡기위한 기교를 부리는데 사랑을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돈을 사랑하면서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에도 수 만 가지가 있다.
매번 사랑에 임하는 자세와 생각이 수도 없이 바뀌어 왔다. 내가 말하는 사랑이란 단지 연애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가족과의 사랑 친구와의 사랑 인간관계의 사랑, 아니, 모든 관계에 있어서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군대 생활관의 동기가 내가 이별을 마주하고 있을 때 따끔한 조언을 해준 적이 있다.
“네가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존재 자체의 가치를 인정해줘라.”
며칠 동안 생각을 해봤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하고 연애를 하고 있었는가?’ 답이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감정적인 마음을 내려놓으려 노력하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 해 봤다.
친구의 말이 맞았다. 나는 내 연인이라는 틀 안에서 사랑을 허용했고 욕심을 포장한 사랑이라는 단어로 타인을 구속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흉기로 위협하며 지속을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생각이 나를 뒤엎고 반복 되었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내 연애의 사랑은 그저 어린 생각의 사랑이었다.
이런 와중 성숙된 사랑의 사례를 찾았다.
18세기 무렵 푸른색 프록코트를 입고 권총으로 자살하는 사람이 급증하게 됐다. 이에 따라 정부가 대응하는 방안으로 한권의 책을 판금 시킨다.
그 책의 제목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1774년 25살청춘의 괴테가 자신이 사랑하는 하는 여자가 자신의 친구와 결혼하게 되는 가슴 아픈 이별을 겪은 후 속전속결로 구상하여 완성된 작품이며 책이 출판되자마자 주인공 베르테르를 모방하는 자살이 늘어나 이후 모방 자살을 베르테르효과라고 일컬을 만큼 사회적 큰 이슈가 되었다. 그 대가로 1775년 출판 후 고작 1년 만에 이 슬픈 사랑이야기를 그린 책은 판금 당하고 만다.
로테는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이자 또 다른 주인공인 베르테르가 사랑한 여인의 이름이다.
베르테르는 로테를 보자마자 새로운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로테는 이미 약혼남이 있는 상태였다. 약혼남이 잠시 파견을 나가있는 동안 베르테르는 로테와 만나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의 깊이를 더해갔다. 베르테르는 벗어나려고 하면 더 깊어져 가는 감정의 늪에서 종종 이성을 잃기 시작한다. 차라리 로테의 약혼남이 죽었더라면 하는 생각까지 미치는 순간 베르테르의 가슴속 상처는 암세포처럼 번져갔고 로테를 향한 갈증은 자신을 처참하게 망가뜨렸다.
결국 갈증을 해소할 방법으로 로테를 계속 만나려 했지만 그저 바닷물로 목을 축일뿐 이었다. 결국 베르테르는 결심한다. 로테를 떠나기로, 이는 로테와 그녀의 약혼남, 또 베르테르 본인을 위한 행동 이였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 가지 못 하고 좌절하고 만다. 로테를 대신해 다른 것을 채워 넣기에는 이미 그의 가슴에는 너무 큰 공허함이 남아있었다.
그는 다시 로테를 만나러간다. 그리고 로테에게 뜨거운 키스를 퍼붓는다. 늘 상상하던 아름다운 광경 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베르테르는 로테의 슬픔을 통해서 자신을 보게 된다. 이미 상처받을 때로 상처받은 베르테르는 자신의 상처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마저 아프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별을 준비한다. 영원한 이별이다. 그는 그녀와 처음 만날 때 입었던 푸른색 프록코트를 입고 총성과 함께 로테를 놓아준다.
베르테르는 로테를 통하여 사랑을 배우고 성숙해 간다. 나 또한 이런 베르테르를 보고 사랑의 성숙을 느꼈다.
푸른색 프록코트를 입고 권총을 들라는 말이 아니다. 베르테르는 로테를 위했다. 이전의 내 동기가 나한테 충고한 것처럼 사랑한다면 그 대상을 그대로 인정하기 위해 애써보라. 더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을 사랑스럽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단지 내 옆에 두고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것을 먹이는 것을 사랑스럽게 만든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말한 것 과 같이 나는 로테를 베르테르의 편지를 통해서 만났다. 로테를 정의하는 방법은 오로지 베르테르의 표현으로 유추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로테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자인지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다. 왜일까? 베르테르의 어휘력이 로테를 향한 내 상상력을 뒤흔들어놔서? 아니다.
베르테르는 어떻게든 로테를 자랑하려하고 그녀를 위한 최상의 표현들을 쓰기위해 애썼다.
마치 영화 홍보 관계자는 시키지도 않는데 그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은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든 영화마냥 강하게 어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애쓰는 베르테르를 만들어 내는 로테가 어떤지 감히 상상하게 되고 인정하게 된다.
베르테르가 그녀를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그것도 자신의 여인이 아니라 따로 약혼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많은 이들이 소유욕과 사랑을 착각한다. 또 설렘과 사랑을 착각한다. 물론 사랑을 하면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고, 설렐 수 있다. 그러나 소유욕과 사랑, 설렘과 사랑은 동의어가 아니다.
‘자신을 위해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할 경우 그 관계는 지속적일 수 없다.’ 그저 내 옆에 두고 싶어서, 설렘에 그 감정을 반복해 느끼고 싶어서 억지로 만들어내는 관계는 오래 갈 수 없다.
나의 필요로 인해 타인을 끌어들이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타인을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하는데 애써야한다. 그리고 피치 못할 이별을 하게 된다면 솔직한 마음을 전하며 서로의 합의점을 찾고 관계를 정리하라.
사랑이 일방적이지 않았다면 사랑을 정리하는 과정 또한 일방적일 수 없다.
자신의 사랑이 소중하듯 타인의 사랑도 소중한 것을 인정하라, 나의 관계를 존중받고 싶다면 먼저 타인의 관계를 존중해야한다.
단지 연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랑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사랑스럽다면 당신 스스로 사랑스러워진 것이 아니다. 당신 곁에 누군가가 당신을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베르테르 같은 사랑을 하기 원한다. 또 로테처럼 사랑받기를, 당신을 로테로 만들어주는 대상을 더 사랑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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