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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른의 세계에 갇힌 아이들의 공허한 눈물 「내 이름은 꾸제트(2016)」

문화예술

by 밍기적아이(MGI) 2019. 12. 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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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꾸제트

어른들이 만들어 낸 세상은 완벽하지 못하다. 그들이 나름대로 만든 세상은 곧 어른이 될 아이들에게 대물림된다. 이때 문제는 대물려진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완벽하지 못한 세상에서 몸만 어른이 되고 마음은 어릴 적에 가둬진 어른이들이다. 그래서 결핍을 바탕으로 자라온 아이들은 어른이 돼서 평생 그 결핍을 기저에 두고 살아간다.

영화는 보육원의 아이들을 특유의 그림체와 천진난만한 대사들로 순수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 아이들의 대사 내용은 들여다 보면 전혀 천진난만하지 않다. 자신이 보육원에 온 이유에 대해서 스스럼없이 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을 삼켜야 했을까. 웃으면서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실망을 견뎌내야 했을까. 이 웃음은 겉으로 보기에 승화된 것처럼 보여서 아이들은 웃고 있지만 관객들은 전혀 웃을 수 없게 만든다.

모자 쓴 꾸제트

꾸제트는 자신의 이름이 왜 이카르로 불리기를 거부한 걸까? 바로 자신의 엄마가 불러주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전부인 부모가 만들어준 세계에서 법적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꾸제트는 엄마가 먹고 난 쓰레기인 맥주캔으로 자신의 세상을 쌓아갈 수밖에 없다. 그 세계를 무너트리는 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긴 연이다. 꾸제트가 연을 날리는 이유는 아버지를 직접 기억하지 못해서 일지도 모른다. 이는 경찰에게 엄마에 대한 묘사는 구체적이면서 아빠에 대한 묘사는 추상적인 것에서 드러난다. 이는 부모 중 한 사람의 부재 자체가 가족의 유지를 휘청거리게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뜻한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을 이 세상에 나오게 해준 존재들의 사랑뿐이다. 그러나 극중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사랑 줄 마음이 없어 보인다. 진심이 전달되는 편지가 없다면 값비싼 Mp3는 무용지물이 된다. Mp3에 진심이 담기는 순간은 아이들이 서로를 구해 줄 때 사용되는 순간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분명 꾸제트임을 제목에서부터 못박고 있지만 가장 많이 공감되는 인물은 시몽이다. 처음에 꾸제트를 괴롭히고 반 전체에서 어른들 특유의 악습인 위계 서열을 세우는 모습은 악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까지 시몽을 그렇게 보지 않는 이유는 시몽의 아픔이 고스란히 공감되기 때문이다. 시몽이 괴로워하고 그 고통의 화살이 향하는 곳은 먼저 떠나는 꾸제트와 까미유가 아닌 어른들이 만든 무책임한 세상 그 자체다.

시몽과 아이들이 새로운 아이들이 올 때마다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자신들의 아픔을 일반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아이들은 보육원에 온 이유가 내가 잘못해서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아이가 보육원에 올 때마다 어떤 잘못으로 어른들에게 버림 받았는지 알아내 자신들의 아픔을 정당화한다.

아메드,주주베,베아,알리스,까미유,꾸제트,시몽 너희가 모두 행복했음 좋겠어

그러나 문제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부모들이다. 이 문제의 해답을 제시해 주는 건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새로운 아기이며 그 아기를 낳은 담임 선생님이다. 그의 담임 선생님은 보육원 아이들의 부모와 달리 아이들이 어떤 행동을 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엄청 못생겨도, 응가 냄새가 나도, 계속 울기만 하고 공부를 못해도 괜찮다고. 그것이 바로 부모가 자식에게 가지는 진정한 사랑일 것이다.

마지막까지 시몽의 기분이 해로 바뀌는 것을 보아도 마음은 편하지 않다. 그 이유는 온전해야 할 아이들의 세계에 보육원이라는 환경으로 인해 선택 입양이라는 어른들의 세계가 필연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이 세계를 보자 하니 씁쓸할 수밖에 없다.

 

글 파도일(견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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