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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창동, <시> : 타자의 고통에 감응하는 윤리적 미학의 추구 - 하슈(HASHU)

문화예술

by 대학매거진 영글 2019. 10. 2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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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시> 스틸컷

프랑스의 철학자 엠마뉴엘 레비나스타인과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 주체성을 규정한다

윤리적 관계의 전제는 '주체가 자기됨을 성립하는 것'이다. 자기됨이란 '주체가 스스로에게 필요한 것을 충족하면서 즐김과 누림을 통해 개체로서 자기성을 확보'하는 것인데 이것을 향유라고 한다

향유의 대상은 먹고, 마시고, 자는 행위들을 포함하는 삶의 구체적 내용이다. 염려와 불안보다는 즐김과 누림을 강조되는 개념인 셈이다. 그러므로 레비나스적인 향유는 곧 개인 주체의 행복이다자칫 개별 주체의 향유가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와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창동의 <>는 개인적 향유와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가 어떻게 한 사람의 삶 속에서 모순 없이 아름답게 승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주인공 미자는 이혼한 딸이 맡긴 중학생 손자 종욱을 데리고 파트타임 간병인으로 일하며 누추하게 살아가지만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삶을 향유하고자 하는 주체이다

꽃을 좋아하고”,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는소녀 취향이 일상에 속박된 사람들에게 묵살되기도 하지만 세계라는 타자, 자신의 곁에 현존하는 타인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민감성은 그녀만의 고유한 내면성을 구성한다

이것은 미자를 향유 이상의 단계, 즉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로 이끌 토대이다.

미자에게는 시를 쓰고자 하는 꿈이 있다

시 쓰기는 필요에 의해 대상에 의존하는 향유를 초월하려는 욕망의 산물이다. 시는 시인의 눈에 비친 대상들은 시인의 윤리의식을 포함한 세계관을 통해 미의식으로 구현된다.’ 영화의 초반부, 미자에게 있어 시란 향유의 연장으로서 추구된다

누추한 거주와 값싼 노동으로 구성된 일상만으로는 부족한 삶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이다. 열망으로 가득한 그녀에게 지역 문화원의 강사인 시인은 시를 쓰려면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야 하고 잘 봐야 한다고 답한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있을 때까지 종이와 연필을 들고 그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창작방법론을 듣고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과 주변을 다시 돌아보기 시작한 그녀는 향유 너머의 어떤 것, 즉 가시적이지 않은 세계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의 신비에 한 발 다가선다

시란 어디에도 존재하지만 시상이란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한다는 깨달음!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시가 주체 내부의 지향성에 의지해 타자로서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대상에의 물질적 의존성 또는 자기 유지를 위한 욕구가 향유의 조건이라면 시는 존재 너머, 주체의 견고한 자기 동일성 외부에 있다는 어렴풋한 깨달음으로 이제 일상의 공간을 비롯해 모든 사건은 시의 잠재태로 미자에게 다가온다.

종욱이 친구들과 함께 동급생 희진을 성폭행해 자살로 몰아넣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미자에게 시는 더욱 강력하게 향유를 넘어 타자의 고통을 전적으로 떠안음으로써 타자와의 윤리적인 관계를 정립하는 것으로 추구된다. 여기서 희진은 고통 받는 타인으로, 시는 쉽사리 그 맨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초월적인 세계의 속살이라는 타자로 위치 지워진다

시 쓰기의 과정을 타자의 맨얼굴과 전적으로 대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시적 언어가 상징질서 속에서 규범화되고 위계화된 언어체계를 위반함으로써 창조 가능하다는 시 창작의 일반론에서도 확인된다. 서구의 근대적 주체는 끊임없이 이성에 기반한 자기 동일성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이는데 이 기획의 핵심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언어/체계이고 이러한 질서를 위반하는 것은 과잉이나 금지, 즉 타자로 규정된다

시적 언어는 타자로서의 광인의 언어인 까닭에 역설적으로 초월성과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미자의 시 쓰기의 여정이 윤리학과 만나게 되는 필연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시와 미자의 만남이 결정적 순간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녀 안에 이미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존재했기에 가능하다. 이것은 시 강좌 중, 내 인생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발표하는 시간에 그녀가 떠올린 과거의 기억에서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서너살 무렵, 햇살이 스며드는 마루에서 예쁜 옷을 입혀준 언니가 자신에게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었던 순간에 대한 기억을 말하며 눈물을 보이는 미자에게서 아름다움과 슬픔이 연동하는 진실을 대면한 경험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시인의 정서 혹은 시의 언어가 효율적 소통을 지향하는 기존의 상징질서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이며, 자의적인 언어적 질서의 파괴를 거쳐서만 얻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미자가 시를 쓰고자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그녀 스스로도 적절한 답을 내놓지 않았지만, 익숙한 듯 여겨지면서도 어딘가 자신과 전적으로 공감되지 못하는 현실이 그녀로 하여금 주어진 질서 밖의 어떤 것을 상상하게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자신을 그려보는, 스스로에 대한 윤리적 성찰로 이어지게 된다.

이창동은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가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대한 안타까움과 의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더 이상 미적 차원을 매개로 개인 또는 집단의 윤리성을 반성하지 않는, 결과적으로 소수가 독점한 일상의 논리가 억압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에 대한 탄식일 수 있을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삶을 살아가던 미자는 바로 이러한 현실을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인 시 쓰기를 통해 타개하고자 한다

이러한 의지는 희진을 자신의 기억 안으로 소환해 극진히 위로하고자 하는 진정성과 만나 한 편의 아름다움 시로 탄생하게 된다. 미적 추구라는 점에서 정서적일 수도, 자신을 비롯한 주변에 대한 윤리적 성찰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성의 승리라고 말할 수도 있는 미자의 마지막 삶의 궤적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미자는 꼭 죽음을 선택했어야 하는 것일까

이미 앞의 시퀀스에서 그녀의 모자가 바람에 날려 강물에 빠지는 장면으로 암시했듯이 일상은 안전하게 관리되는 상태에서는 그 모순을 드러내지 않으므로 초월적 도약으로 비일상의 장을 열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주체의 존재론적 결단이 요구될 수도 있다

학교와 경찰, 가해자의 부모들 모두가, 심지어 남은 자식을 위해 돈이 필요해 합의를 할 수밖에 없는 희진의 어머니마저, 희진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 망각 속에 매장하고자 할 때, 미자는 애타게 시상을 찾는 마음으로 무엇엔가 이끌리듯 희진의 흔적을 쫓는다

합의를 위해 방문한 희진의 집에서 시작된 미자 혼자만의 애도와 기억의 제의는 성폭행을 당했던 과학 실험실, 앳된 몸을 던진 강가, 그리고 추모미사가 열리는 성당으로 이어진다

이 여정은 영혼의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이다

즉, 가해자 소년들의 장래를 위해 혹은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논리로 희진에 대한 기억을 온전히 지우지 못해 조바심이 난 현명한 이들의 시선으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진실, 타인의 고통을 나의 그것으로 완전히 수용함으로써 쟁취한 과정이다.

여기에 미자가 치매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이 덧씌워져 희진을 기억함으로써 시에 다가가는 그녀의 의지와 치매로 인한 망각에 대한 거부가 결합된다. 보통의 경우, 치매는 물론 다양한 개인적 불행의 사태에 직면하면 과장된 자기 연민의 나르시시즘 속으로 퇴행하기 마련이지만 미자는 생활의 궁핍에 매몰되지 않았던 것처럼 기억을 잃어가는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자의 죽음은 외부로부터 우연한 사건으로 다가온, 삶이 완전히 성숙되기 이전에 엄습한 낯선 죽음이 아니라 신(절대성 혹은 완전성으로서의)에 의해 보상되는 삶의 내재성의 필연성에 비롯된 고유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과 관련해 개인성을 획득한 주체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낯선 죽음을 정신적으로 승화시켜 고유한 죽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인데 미자는 견고한 지배의 원리가 강제하는 억압적 상징질서를 내면으로부터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영화 비평이 문예비평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다

이것은 주로 문화연구의 영향인 듯하다. 자신감을 잃은 비평은 예술의 고유성을 보존하면서 문화적 소통의 장으로 불러오는 역할을 일정 정도 포기하고 여러 인접 학문의 아카데미즘적 성과 또는 저널리즘이 유통시키는 화려한 수사를 통해 주류 담론의 위계질서 안으로 포섭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필자 또한 영화를 산업과 오락의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과연 영화 비평의 설 자리가 있기는 한 것인지 자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위협적인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거리를 취하고 고집스럽게 자신을 지양해가는 인물이나 사건을 그린 영화가 존재하는 한, 문화적 기억이라는 커다란 장 속에 영화의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와 같은 영화에 좀 더 깊은 숨을 불어넣는 비평 작업은 필요할 것 같다. 마치 미자가 시를 쓰기 위해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활짝 열고 타자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윤리적 미학을 완성했듯이


황혜진(영화평론가목원대학교 TV.영화학부 교수)
편집 : 하슈 


<위 글은 씨네포럼15(2012년 겨울호)에 실린 고통에 대한 감수성의 윤리학 레비나스의 철학적 관점에서 본 <밀양><>를 중심으로의 일부를 발췌,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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