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옛날, 고대 그리스나 로마 혹은 동양의 교육은 귀족 계급이나 받는 특권층을 위한 것이었다. 교육은 누구나 받아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를 기대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특별한 계층에 있는 인재의 수월성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다가 근대에 와서 시작된 공교육은 군사력처럼 국가의 힘으로 인식되어 누구나 받아야 하는 것으로 제도화되었다. 국가의 힘으로서의 교육은 더욱 확대되어 일종의 복지였다.
즉, 누구나 받는 평등성의 새로운 원리가 작동되는 제도가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육은 수월성과 평등성의 두 원리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과 조화를 이룰 것인가가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특정 계급만 누리던 교육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됨으로써 보통 사람에게 교육은 입신양명 출세의 길이 되었다. 조선 시대 역사를 보더라도 교육을 통한 과거의 급제는 어려웠으나 많은 평민에게도 꿈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도 우리 민족은 교육을 통한 계층 상층 1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높은 지위는 높은 교육 없이는 결코 획득될 수 없음을 사람들이 똑똑하게 보아왔기 때문이다.
출세의 길인 교육이 개인의 적성과 능력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면 평등성의 원리는 별문제 없이 지켜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개인의 적성과 능력과는 다른 재산, 출생 지역, 성 등이 교육의 평등성을 저해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오히려 사회적 이동성을 낮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구소련 체제에서의 사회적 이동성이 자본주의 체제의 미국에서보다 더 높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말하자면 개천에서 용이 날 확률이 미국보다 구소련에서 더 높았다는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교육의 양극화는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양자 간 균형은 거의 포기에 가깝다. 정부는 복지 문제처럼 약자에게 최소한의 도움만을 주고자 하고 있다.
OECD가 세계 각국의 15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표집 하여 읽기, 수학, 과학 성적을 주기적으로 평가하는 PISA(program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에서 한국은 매번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2012년 60여 개 국의 PISA 평가에서는 우리가 본보기로 삼고 있는 핀란드보다도 과학을 제외한 읽기, 수학 성적에서는 앞서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지역 간 격차와 남녀 학생 간 성적(특히 과학) 차이가 세계적으로 크다는 점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아도 시대가 갈수록 열악한 개천에서 출세하는 용이 나올 확률이 적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수십 년 전과 비교할 때 오늘날 지역 격차는 너무나 심해져서 지방 학교 출신이 수도권 상위 대학 입학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워졌다. 최근의 출신 학교별 대학 입학생 분포에서 여실하게 지역 격차의 문제를 읽을 수 있었다. 더구나 지난 정부 들어 기존의 특목고 이외에도 다양한 자율고를 만들어 학교 간 격차까지도 심화시켜 놓았다.
대학교의 사정도 유사하다. 이전보다 지역 간 차이가 더 심화하였다. 소위 경쟁에 의한 정부의 예산 지원 원칙을 내세워 출발선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모든 부면에서 대학 간 경쟁이 되고 있다.
지방은 수도권보다 여러 가지 점에서 열악하므로 같은 선상에서 경쟁이 될 수가 없다. 인적 자원, 지방자치 단체의 지원, 문화 시설 등의 차이 때문에 개인의 적성과 능력이 같은 학생이 모인 대학이라고 하더라도 지방 대학과 수도권 대학 간은 공정한 경쟁이 된다고 말할 수가 없다.
필자는 작년에 서울의 한 열악한 대안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나서서 그 학생들을 지도해 주는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방의 전문가 자원보다는 훨씬 풍부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학생들이 아마 열악한 환경의 지역에 있었다면 그러한 도움은 거의 받을 수 없어 그만큼 성장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대학은 물론 전국 최악의 환경에 있지는 않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최상위의 환경에 있지도 않다. 유능한 우리 대학교 학생이 마음대로 적성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국 최고의 환경인가를 묻는다면 바로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초중고 교육뿐 아니라 대학 교육은 지역과, 재산, 성 등과 관계없이 개인의 적성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교육 환경은 그 반대로 나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우리는 개천에서 많은 용이 나는 우리 사회를 만들 수가 없을까?
글 : 충남대학교 교육학과 김두정 교수
편집 : 하슈(HA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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